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 천주교 박해 (문단 편집) === 기해박해[anchor(기해박해)] === [youtube(hRzQX0cdkc8)] ||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신앙고백을 가사로 만든 생활성가. [[천주교 수원교구]] [[김태진 베난시오]] 신부 작곡.|| [[1839년]]([[헌종(조선)|헌종]] 5년)에 일어난 박해. [[파리외방전교회]]에서 파견된 [[프랑스인]] 성직자인 [[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|앵베르 범 라우렌시오]] 주교[* [[천주교 서울대교구]] 제2대 교구장. 라우렌시오를 [[프랑스어]]로 읽으면 로랑이며, 범은 앵베르 주교가 쓰던 조선 이름인 범세형을 줄였다. 앵베르 주교를 따라온 [[피에르 모방|모방 신부]]와 샤스탕 신부의 프랑스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프랑스어로 읽은 피에르, 자크로 두 신부는 나백다록, 정아각백이란 조선 이름을 썼다. 앵베르 주교가 2대 교구장인 이유는 전임자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(1792~1835. 세례명 바르톨로메오, 조선식 성은 소蘇) 주교가 초대 교구장(당시에는 조선대목구 감목, 이후 [[서울대교구]] 교구장 목록으로 소급)이며 범 주교는 후임이다.], [[피에르 모방|모방 나 베드로]] 신부,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, 그 외 수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[[순교]]했다. 1801년 [[신유박해]]가 일어난 뒤 천주교 포교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었지만, 이후 [[홍경래의 난]]과 [[세도정치]]의 문란 등 사회혼란이 가중되면서 천주교는 평민들 사이로 다시 한번 포교를 확대할 수 있었다. 이는 정치적 변화 탓도 있었는데, 우선 신유박해를 일으킨 [[정순왕후 김씨(조선)|정순왕후 김씨]]부터가 정적이던 남인 양반들 숙청용으로 천주교를 이용할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평민 신자들은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고, 정순왕후 세력이 실각한 이후 [[순조]] 시대를 이끈 [[김조순]]이 등용한 [[안동 김씨]] [[시파]]들 중엔 '''[[천주교]] [[세례성사]]를 받은 신자'''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탄압이 한동안 누그러들 수 있었다. 이러한 상황 속에서 [[교황]] [[그레고리오 16세]]는 [[1831년]] [[9월 9일]]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[[천주교 서울대교구|조선대목구]]를 설정, [[가톨릭/대한민국|조선천주교회]]는 독립된 [[교구]]가 되었으며 [[파리외방전교회]]가 조선 사목을 맡게 된다. 1836~37년 사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[[프랑스인]] 주교 앵베르, 신부 모방, 샤스탕이 조선으로 몰래 입국해서 본격적으로 포교에 나서자 천주교의 세는 신유박해 전보다 커지게 된다. 하지만 이런 교세 확장에 경계심이 일어나고, 마침 1834년 [[순조]]가 사망하고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즉위하자, (세도정치 구도는 일단은 [[안동 김씨]]가 우세했지만) 1839년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던 우의정 이지연(李止淵, 1777 ~ 1841)[* 1840년에 천주교인도 아닌데도 또는 배교 했다는데도 사람을 죽게했다는 것을 묵인했다는 것과 대사간 이재학(李在鶴), 대사헌 이의준(李義準) 등이 정권을 마음대로 했다고 탄핵당하여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당하여 그곳에 죽게된다.] 이 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한번 박해가 일어난다. 피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논란이 커지자, 더는 신자들의 박해를 볼 수 없던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, 모방 신부, 샤스탕 신부는 자수했고, 조선 조정에서는 신유박해 때 청나라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사례와 똑같이 적용해 이들과 천주교인 대부분을 처형했다. 그리고 [[순교]]당한 [[양반]]들 일부가 안동 김씨와 연루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, 박해 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[[풍양 조씨]]가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, 안동 김씨는 [[철종(조선)|철종]] 즉위 전까지 수세에 처했다는 해석도 있다. 다만 풍양 조씨의 확대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양해가 있었을 뿐이고, [[헌종(조선)|헌종]]은 [[척신]] 자체를 척결하려고 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. 철종 집권기에 풍양 조씨에 대한 반격이 의외로 적었기 때문. 성 [[정하상]] 바오로를 비롯한 총 70명의 순교자들이 1984년 [[교황]] [[요한 바오로 2세]] 방한 때 [[시성|성인품]]에 올랐다. 자세한 것은 [[한국 103위 순교성인]] 참고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